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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인물들

미켈란젤로 작품 세계, 천재이자 불통의 예술가 그의 생애 기록

by W_m 202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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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려함을 시작으로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열었던 전재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사실 화가라기보다는 조각가로 불리기 원했다고 하는데요, 미술사상 남자의 육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사실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의혹도 많았지만, 어쨌든 미켈란젤로는 평생 미혼으로 살아가면서 성당과 거리를 장식하는 그림과 조각에만 일생을 바친 예술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작품
미켈란젤로 작품

미켈란젤로 작품 세계

1492년 피렌체의 아버지, 로렌초가 죽고 프랑스가 피렌체를 공격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여기에 극단적 금욕주의자 수도사인 사보나롤라가 피렌 체인들의 정신을 지배하였으며, 이때 문화와 예술은 탄압을 받기 시작합니다. 피렌체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으며, 미켈란젤로는 피신을 하듯 로마로 떠나게 되었죠, 로마에 온 미켈란젤로는 1496년, 메디치가의 쾌락주의를 반영하는 조각상인 '바쿠스'를 조각하고, 1499년에는 슬픔과 고통을 내면화시키면서 고고하고도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피에타'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1501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조각상을 의뢰받고, 1504년에 불후의 명작인 '다비드상'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다비드'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가장 완벽하게 그리고 조화롭게 표현되었으며, 르네상스 조각의 대표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때의 미술평론가 바 잘리는 "다비드상 때문에 고대와 현대, 그리스와 로마의 모든 작품들은 인상이 희미해졌다" 라며 극찬을 하였고 이 거상은 미켈란젤로의 의견에 따라 시청 문 앞에 전시하면서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으로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시스타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렸는데, 이때 '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 등의 3장 9 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렸으며, 그 화면 사이에 예언가와 천사들을 배치하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리석상과 같은 인간 군상을 함께 그려 놓았지요, 4년 동안 천장에 매달려 거의 혼자서 그림을 그렸기에 그림이 완성될 쯤에는 미켈란젤로의 목과 눈에 이상이 생겼고, 무릎과 등뼈가 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스티나 천정화가 완성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사망하였고 이미 죽은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그의 묘당에 안치할 목적으로 '모세상'을 조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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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미켈란젤로의 그림과 조각들은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것이죠, 사람들은 그의 작품 앞에서 열광하였고 교황과 귀족들까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손에 넣기 위해 조바심을 내야 할 정도도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유명한 문필가인 아레티노는 그에게 스케치 한 장을 얻기 위해 1년 동안 편지를 썼지만 결국 얻지 못하였고 너무 분했던 그는 이후에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최고의 성당보다는 목욕탕에 더 어울릴 작품'이라고 비웃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생활까지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있는 동안 이미 '신화'가 되었으며 바잘리는 "르네상스 예술가 평전"에서 당시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미켈란젤로를 다루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그는 이후에 등장한 카라바지오, 카라치, 루벤스, 베라스 케스, 렘브란트, 푸생 등의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는 예술가로 이름 높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그가 만든 작품의 아름다움에도 있지만, 그가 평생 잃지 않았던 자유분붕한 사고와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에도 있으며 그는 실력으로 평가받겠다는 듯 누구 앞에서도 작가로서의 고집과 주관을 버리지 않은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교황이 바쁘다며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교황이 날 찾으면 없다고 하라'며 로마를 떠나 버리기도 하였으며, 추기경 비아지오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마디 하자 그를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지옥의 사신 미노스로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조각칼을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부지런히 예술혼을 불태웠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제작 주문에 의해 맡은 일이 너무 많아지자 미켈란젤로는 절망과 혼란에 빠지기까지 했으며 여기에 극단적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미완성으로 남기는 작품들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이후에 그는 이런 상황을 "수많은 칼이 나를 찌르는 듯 고통스러웠다"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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